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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 (인+간)] 부산대한의학전문대학원교수 윤영주(학생운동하다 제적, 노동운동에 옥살이까지 서울대 의대 졸업하는 데만 23년 걸렸습니다.) 게시글 내용
제목 [人+間 (인+간)] 부산대한의학전문대학원교수 윤영주(학생운동하다 제적, 노동운동에 옥살이까지 서울대 의대 졸업하는 데만 23년 걸렸습니다.) 2013-05-09



▲ 윤영주 교수는 어렵던 시절 "지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처럼 힘들다면
가장 힘든 것은 이미 지나간 거야" 라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남다른 인생역정을 보낸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윤영주 교수를 만났다.
윤 교수는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가 학생운동으로 제적됐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뒤늦게 동의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수석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재입학해 입학 23년 만에 의대를 졸업했다.
지금은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모두 취득한 복수면허자가 되어 치료가 잘 안 되는 환자들을 한양방 협진으로 진료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진짜 원하는 것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참 멀리 돌아온 그에게 인생의 의미와 행복은 무엇일까.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윤영주(49) 교수.
프로필을 보고 어떤 사람인지 빨리 만나고 싶었다.
수줍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없이 여리게 보인다.
누구보다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힘들게 돌아가는 삶을 선택했을까.
그를 만나고 나니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이고, 행복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人+間'은 두 차례의 인터뷰, 그의 저서 및 각종 칼럼에 기고한 글을 종합해 일인칭 시점으로 인생 역정을 재구성했다.

한 해가 서서히 저문다. 해가 바뀌면 이제 나이가….
나이를 생각하니 체력도 능력도 더 떨어지는 것 같아 10년 정도 젊게 살기로 했다.
마음 먹기 따라 생각만큼은 얼마든지 젊은 사람을 따라갈 수 있으니까.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고입 연합고사에서 전국 여자 수석을 차지해 부모님과 선생님을 기쁘게 했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누가 물으면 그때마다 의사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집안 형편도 어려웠지만 신장이 안 좋아 응급실로 자주 실려가던 어머니를 보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81학번으로 서울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나는 공부만 잘했다.
공부 외에는 지금도 잘하는 게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이야기는 시험을 잘 본다는 말이다.
시험을 잘 보려면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잘 뽑아서 달달 외우면 된다.
공부를 잘 하는 게 창조적 능력이나 전문적 실력이 있다는 말과 절대 동의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은 과도하게 평가된다. 물론 나도 그 덕을 보았다.

의예과 시절 서울 봉천동의 달동네에서 의료봉사를 하다 회의가 왔다.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질병을 얻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밥 잘 챙겨 먹고 과로하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을 따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되면 그들의 병도 많이 사라질 것인데...
환자를 고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고치는 일이 더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난 이과보다 문과형의 사람이었다.
'의사의 길', 이건 나에게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초. 의대생이 학생운동을 하고, 그러다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그리 특별하지 않던 시대였다.

의예과 시절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환자 고치는 일보다 사회 고치는 일이 더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했다.
수배생활 하다 제적, 옥살이까지 겪은 후 정해진 운명처럼 한의대 입학했다 우여곡절 끝 수석졸업 뒤 서울대 복학 마흔둘 최고령으로 학사모 썼다.


수배 생활을 하다 85년 학교에서 제적이 되었다.
어차피 '의사의 길'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주로 경기도 성남에서 활동을 했다.
봉제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서 '시다' 생활도 했다.
이게 나에게 맞는 길이라고 믿었다.
87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6개월 옥고를 치른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88년 노태우 정권 출범과 함께 사면되었다.
하지만 복학해서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져들었다.
칼바람 부는 엄동설한에 홑껍데기만 걸치고 혼자 내몰린 느낌이었다.

그 컴컴한 터널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이 나를 구원해 주었다.
'동지(冬至)에 일양(一陽)이 시생(始生)'이라는 말을 이때 알게 됐다.
'밤이 깊고 혹한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천지의 기운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말이 그렇게 가슴 벅찰 수 없었다.
그 뒤 이 말은 하나의 주문이 되었다.
지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처럼 힘들다면 가장 힘든 것은 이미 지나간 거야,
이렇게 되뇌었다. 자연스럽게 옆동네 학문인 한의학으로 관심이 이어졌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한의학에 관심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1994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운명처럼 동의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한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의술보다 생각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난 서양의학보다 한의학에 더 맞는 사람이었다.

시련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95~96년 한약분쟁으로 우리는 전원 유급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학교를 일 년 더 다녀야 했다.
1년 반이 넘는 투쟁 기간에 경험한 그 뜨거운 논쟁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나고 나니 그게 빛이 되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2001년 입학한 지 7년 만에 동의대 한의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마침 서울대에서 학생운동과 관련된 제적생에게 복학을 허용했다.
늦었지만 서울대 본과 2학년에 재입학하기로 결심했다. 부산일보에 이때 기사가 실렸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주부의 몸이지만 뒤늦게 시작한 공부라 열심히 학업에 힘쓴 결과 수석졸업이란 영예까지 안았다.'
그때 기사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지금보다 많이 앳되게 보인다.
2004년 입학한 지 23년 만에 마침내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학위수여식에서 마흔둘의 최고령 졸업자로 학사모를 썼다.
그해에 의사 면허를 따서 '복수면허자'가 되었다.
 

편한 길 두고 왜 힘든 길 돌아왔느냐고?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내가 원했던 일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싶다.
 의사·한의사 면허 모두 취득했지만
 한쪽 전문가 되기도 쉽지 않은 길…
 서양 의학- 한의학 융합 땐 상승효과
 두 의학 소통 '가교 역할' 하고 싶다

 



▲ 윤영주 씨가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왼쪽),
다시 서울대에 입학한 지 23년 만에 의대를 졸업해서(가운데),
현재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는 모습.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의 미소를 윤 씨에게서 만날 수 있다.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모두 취득한 복수면허자는 아주 드물었지만 1990년대 이후  늘고 있다.
지금은 220명이 넘고 복수면허자들이 모인 '대한동서의학회'까지 생겨났다.
일반인들은 "하나도 힘든데 두 개씩이나 참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사나 한의사들이 복수면허자를 보는 눈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믿을 수 없는 박쥐,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얼치기로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 한 가지 전문가도 되기가 쉽지 않아 노력을 무척 많이 해야 한다.

양쪽이 협력을 못하는 현실이 아쉽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인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라 치료 원칙이나 방법도 차이가 난다.
잘 결합되면 상보적, 상승적인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는데. 복수면허자는 양쪽이 협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힘들게 배운 두 의학을 모두 활용해 새로운 의학을 개척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분들에게 격려를 해 주면 좋겠다.

2006년 서울대 의대에서 한의학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됐다.
서울대 의대 본과 4학년을 대상으로 '한의학과 보완대체의학' 강좌를 연다는 사실은 일간 신문을 장식했다. 난 경험이 부족했지만 복수면허자라는 사실 덕분에 강의를 맡았다.

강좌는 뜨겁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학점 때문에 할 수 없이 수업을 듣지만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이런 것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의대에서 하는 한의학 강의가 중세시대의 천동설 옹호처럼 비쳤다고도 말했다.
 
수업을 돕기 위해 개설한 인터넷 질의·응답 게시판은 질문이 폭주했다.
그만큼 소통에 대한 욕구가 컸다.
난 의사로서 임상 경험이 부족하고, 한의계를 대표할 역량을 가지지도 못했다.
하지만 서양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알고 있고, 궁금한 부분을 찾아보거나 주변에 문의할 때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내 소명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소통이었다.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답변한 것을 정리해 '한의학 탐사여행-서울대 의대생 한의학을 만나다'라는 책도 펴냈다.
두 의학의 소통을 위해 가교 역할을 하기로 했다.
 
윤 교수는 안전하고 보장된 일만 하려는
요즘 학생들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는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진짜 원하는 것을 찾으라고 당부한다.

 



지난해 초 한의사가 되기 위해 첫발을 디딘 부산에 다시 오게 됐다.
지금은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동서협진의학교실 교수이자 부산대 한방병원 알러지 면역 클리닉 의사로  일하고 있다.
여기서는 치료 전 과정에 한양방 협진을 해서 양약을 병용하거나 서서히 줄여나가기도 한다.
특히 아토피 피부염, 알레르기성 접촉성 피부염, 알레르기성 비염이나 천식, 선천성 면역결핍증은 한양방 협진 치료가 효과적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집도, 차도 없다.
생애 처음으로 아파트 분양을 받아 내년에 입주할 예정이다.
무주택 기간이 길고 나이도 많아서 점수가 높았다.
2003년까지는 학생이었고 그 뒤에도 계속 공부를 하느라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다.
취직해서 일하니까 한의사도 월급이 많지 않다.
개업해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까, 나에게 가끔 물어본다.
 

내가 나에게 하는 답은 늘 이렇다.
인생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그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래서 돈이 멀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는 데 돈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학생들을 상담하다 보면 너무 안전하고 보장된 일만 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진짜 원하는 것을 찾으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 나이,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기에 등등 여러 이유로 포기하는 학생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나아가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 아니더라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행복이 아닐까.

대학원에서 한 교수님이  "한의학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한의사가 건강하게 100세까지 장수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셨다.
들을 때마다 웃어넘겼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세상을 고치고 환자를 돕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새해에는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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